간만에 함께 쉬는 휴일이었다. 해가 뜨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미도리를 위해 빛이 잘 들어오지 못 하도록 커튼을 쳐 두고 치아키는 간단히 씻은 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뒤, 팔랑 거리는 종이 소리 사이로 희미한 물소리가 겹쳐들더니 미도리가 여전히 눈에서 잠기운을 거두지 못하고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와 치아키의 곁에 힘없이 풀썩 쓰러지듯 소파 위로 몸을 내던졌다. “타카미네, 그러다 다친다.” “우으음” 소파 등받이 위로 한껏 뒤로 젖혀진 고개를 다시 가눌 생각도 하지 않고 치아키의 주의에 성의 없이 목을 울리던 미도리가 눈을 살풋 뜬 채로 눈동자를 치아키의 귓바퀴에 걸려있는 안경테를 향해 도로록 굴렸다. “그 책, 재밌어요?” 여전히 목울대..
*탄산 믹서기님(@lsy_tansan)께서 소재 “꽃다발” 주셨습니다 :D ‘데리러 오지 마세요.’ 화면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치아키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먼저 일 때문에 늦게 집에 들어갈 것 같다고 아침에 얘기를 해 두긴 했으나, 저녁식사도 하지 않은 채 예상 외로 일찍 돌아오게 되어 집에 도착하자 마자 곧바로 보낸 데리러 가겠다는 메시지에 대한 답이 뭐랄까, 느낌이 좀. 왜, 를 적으려다 움찔거리며 멈춘 손가락이 허공에서 헛돌다 화면을 눌러 본심과는 다소 다른 문장을 찍어냈다. ‘알겠다, 그래도 혹시 필요하면 불러줘. 좋은 시간 보내고 와라.’ “…” 미간을 좁히고 제가 쓴 메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결국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은 빼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부엌에 들어가 불을 켜니 자신이 집에 ..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오!” 락커룸을 나가는 후배의 목소리를 등진 채 벤치에 앉아 상체를 숙여 농구화의 끈을 풀던 모리사와 치아키는 빠르게 농구화에서 빼낸 발을 실내화에 욱여넣고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순간 눈 앞이 핑 돌며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탓에 다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거리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자 조금씩 뿌옇게 돌아오는 시야에 무거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침 연습 때도 무리하지 않으려고 연습지도를 위주로 몸을 썼건만, 오늘따라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옷을 마저 갈아 입은 뒤 조금씩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차가운 손끝으로 눌러대며 락커룸을 빠져나오자 밝지만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썰렁한 체육관이 저를 반겼다. 서늘한 마룻바닥으..
시작은 모리사와 치아키, 그 자신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 한명이 꽤나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연인과 헤어진 것을 발단으로 동료들 사이에서는 관계의 끝에 대한 얘기가 돌고 돌았다. 비단 연인관계의 끝 뿐만 아니라 여러 관계의 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평소 끝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 자리에서 만큼은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화에 참여했다. 끝은 언제 찾아오는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고해야 하는가, 등등. 사실은 살아가면서 이따금 해볼 법한 생각들이었다.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타카미네 미도리와의 끝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 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이고, 상대방이 원하는 끝..
‘타카미네’ 가디건을 걸치고 휴대폰을 챙긴 후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선배의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묶였다. ‘잠깐, 나를 좀 봐 줘.’ 머뭇거렸으나 뒤를 돌아 선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마주보고 있기를 잠시, 선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라 반응해야 하나.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 뒤에 선배는 다시 못을 박 듯 말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아까 무슨 말을 했더라. ‘이제까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괜찮아.’ 싸웠더라. ‘미안하다 타카미네.’ 역시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알아줘.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형태가 마냥 아름답지는 못한 것 같다만.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얼굴..
여름 해가 몇 시간을 내리 쬐어 신을 신은 발을 올려 두기만 해도 열기가 후끈 올라와 다리를 뼈 째로 녹여버릴 듯 달궈졌던 아스팔트 도로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 모리사와 치아키는 보도 위 작동이 중단된 분수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야외 데이트에 폭주하는 심장박동을 잠재우기 위해 약속장소까지 오늘 길 내내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은 빼둔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올려 시계탑을 잠깐 쳐다본 치아키는 10분 남은 약속시간을 확인하고 시선을 시계탑 너머 주황빛 보랏빛이 섞여 노을지는 하늘에 두었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눈을 살짝 감고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자전거 바퀴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 저 멀리서 까르르하고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
“선배, 우리 헤어질까요.” 모리사와 치아키는 타카미네 미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카미네 미도리는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생각해왔어요. 저희 그래도 굉장히 긴 시간을 연인으로서 사귀었잖아요. 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요. 사랑받고 있다는 걸 항상 느끼니까. 근데, 나는 항상 선배를 필요로 하지 않아. 매순간 보고싶어하지 않아요. 선배의 지인들은 전부 나를 알고, 항상 나를 보면 모리사와 치아키가 널 끼고 다니지 못해 안달이다 라는 말을 해요. 그런데 내 지인들은? 선배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나요? 아니야. 매순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모리사와 선배를 싫어하..
여기서 한 모금만 더 마시면 난 죽을 거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모리사와 치아키는 술집에 딸린 화장실 안의 세면대 위 거울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분명 술 깰 겸 물 좀 묻히려 했던 것 같은데 깜빡깜빡 곧 점멸할 듯한 의식 사이로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 결과, 몸엔 물 한 방울 안 묻어있고 저는 고개를 밤공기에 시원해진 거울에 이마를 대고 진탕 술에 절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숨이 거울 표면을 타고 도로 제 얼굴로 올라와 다시 한 번 더 코로 술을 마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자 간신히 이마를 거울로부터 떼어내었다. 이 정도로 마시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본 동창들의 얼굴에 신이 나기도 했지만 긴장이 완전히 풀려있던 모양이다. 집에 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캬-” “우와, 완전 아저씨같은 감탄사” “음- 아저씨라면 아저씨라고 할 수도 있지 않나!” “... 뭐, 아저씨라고 정의할 수 있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선배 얼굴 보고 아저씨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딱 잘라 이야기하는 미도리 앞에서 치아키는 푸슬푸슬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아직 반쯤 차 있는 맥주캔을 얼굴에 가져다대었다. “으아- 역시 덥긴 덥구나. 맥주도 금방 식는 것 같다!” 모리사와 치아키와 타카미네 미도리는, 열대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치아키는 냉방기구에 약했다. 에어컨을 들여놓기는 했으나 제습의 용도로만 주로 사용할 뿐 냉방으로는 잔기침을 하고 코를 훌쩍이기 시작하는 치아키 덕에 30분 이상을 틀어 놓을 수가 없었다. 일하는 곳에서는 냉방을..
옅은 풀잎 냄새와 아득하게 들려오는 물소리에 타카미네 미도리는 눈을 살며시 떴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탁상시계를 확인한 미도리는 '오늘 어쩌면 저 사람, 지각할지도 모르겠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잠금 장치가 고장난 화장실 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려 문을 열자 보이는 광경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선배..." "흐으아갸갹!!! 아! 타가미네!! 일어났으아악!! 잠깐 눈!! 눈이!!" ".....하아, 또 비누로 머리 감고 있죠 진짜..."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세면대 앞에서 펄쩍 뛰어올랐던 모리사와 치아키는 머리에서 흘러내려 눈에 들어간 비눗물 때문에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급하면 차라리 드라이 샴푸 쓰랬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