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미네가 해외 로케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이다. 바득바득 일정을 앞당기고 미뤄 바로 오늘을 휴일로 만들어낸 모리사와가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메신저 앱을 켜고 타카미네와의 대화창에 들어가 잠들기 전에 수십 번을 확인한 도착시간을 다시 눈에 새겼다. 몇시간 뒤에 새파란 하늘을 가르며 착륙할 비행기 안에서 타카미네 미도리는 지금 꾸역꾸역 긴 몸을 담요와 함께 말아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창밖이 어두웠다. 맞춰두었던 알람시간보다 한참 전에 깨어버린 모리사와는 다시 눕는 대신 이른 준비를 택했다. 어차피 지금 깬 걸 보면 같은 이유로 제대로 다시 자지 못하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차를 모는 모리사와는 자꾸 들뜬 마음을 따..
야채절임이 맛있는 내 단골집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 내가 자주 오는 이 선술집의 주인은 은퇴한 연예인이다. 이 사실은 언젠가 술에 꼴아서 우리 집에 들이닥친 주제에 2차를 외쳐대던 친구 덕에 알게 된 사실이다. 평소 연예계에 관심이 많던 친구는 술을 더 달라며 징징대는 그 입을 막기 위해 데려간 내 단골집에서 단숨에 술기운을 떨쳐내고 내게 귓속말로 사장님의 정체를 까발렸다. 카운터 뒤에서 칼질하고 있는 저 꽃미남을 보고도 여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냐며. 그 자리에서 사장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취미도 일도 연예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로서는 갑작스레 단골집 사장님의 개인정보를 턴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잘생긴 얼굴이긴 해서 호기심이 동해 그 자리에서 폰으로 검색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검색 ..
*하이틴 AU 모리사와가 던진 농구공이 백보드를 맞고 튕겨나와 네트를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튀어오르는 공을 잡아 모리사와는 옆구리와 팔 사이에 끼고 티셔츠로 대충 땀을 닦아냈다. 그 사이 승용차 하나가 옆집 차고로 들어갔다. 꽤 늦게 들어왔군. 모리사와는 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전에 공을 대충 내려놓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겉옷을 집어올려 팔을 끼워넣고 마당 구석에 세워져있던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몇 블록 떨어진 곳의 피자가게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타카미네는 오늘은 일찍 자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뒤로한 채 계단을 올랐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던진 뒤에 메신저 알림으로 끊임없이 번쩍대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 대충 머리맡에 던져놓았다. 벽면에 늘어놓았던 ..
모리사와 치아키가 악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악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정의는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 그럼에도 모리사와 치아키가 믿은 것은 결국 정의가 그 모든 것에 있어 승리하리란 사실이었다. 소년은 사람들을 믿었다. 운 좋게도 그는 고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 믿음이 흔들릴 만한 일을 겪지 않았다.그랬던 그가 히어로를 표방해 명맥을 유지해온 아이돌 유닛에 들어가 마주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악의였다. 악의에는 그럴듯한 이유조차 없었다. 이유없는 악의에 치아키는 자꾸만 작아졌다. 치아키가 유닛에 들어오기 전의 티 없는 꿈의 일부 같았던 대장은 떠났다. 그래도 저보다 높은 곳에서 시작해 계속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동급생은 돌연 사라졌다. 홀로 남아 ..

*19.12.22 치아미도 교류회 주최자분, 참가자분들 모두 너무 감사드립니다!(ㅠㅠ) “많이 피곤한가?” 꿈과 현실 그 사이를 넘나들며 꾸벅꾸벅 졸던 나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에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조금.” 사실은 재미없어서 지루한 거지만. “조금만 참아봐라, 맨 앞에서 졸기엔 좀 그렇지 않나..!” “노력해볼게요...” 대답에 이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자 모리사와 선배가 내 한 손을 잡아채고는 책상 밑으로 가져갔다. 길게 늘어지던 하품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장난해요? 그렇게 꽉 쥐면 당하는 사람은 아프다구요.” “미안. 하지만 뽀뽀로 깨울 수는 없지 않나.”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그리고 네 혈액순환..
타카미네 미도리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잊을 리 없다. 눈이 멀어버릴 듯 위에서 쏟아지는 쨍한 빛 속에서 모리사와 치아키에게 전했던 진심 한 조각을 기억한다. 그날로 마음을 더욱 굳힌 셈이다. 당신을 따라온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고. 자신은 그 1년 동안 많이 변했고, 그 앞으로도 변할 생각이었다. 인생에도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미도리가 마음 먹은 것은 그 자신 안의 꽤나 큰 변화를 필요로 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지난날의 자신에게 발이 붙잡혀 멈추어 서 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지켜봐 달라고 떵떵 소리쳐놓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제 상식으로 생각해봤을 때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어도 나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얹어주는 부담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테니까. 나는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고여있을 것이다. 남에게 폐끼치기 싫어 움직이는 삶이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라면 진작에 썩어버릴 때까지 멈춰있었을 것이다. 어영부영 어떻게든 이어붙여나가던 인생이 조금씩 주춤대더니 기어코 멈추고 말았다. 이유는 주변 모두의 납득이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죽고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타카미네 미도리라면 더욱.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향해 쏟아질 질책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실망한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굳이 미움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생긴 자유에..
타카미네 미도리는 연애를 하지 못한다. 타카미네 미도리라는 사람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 한 수많은 사람들이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했다. 직접 불러내어 둥글게 말아 쥔 두 손, 울긋불긋한 얼굴을 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짧은 수신음과 함께 밝아지는 휴대폰 화면 위로 떠오른 토막난 장문의 메일로. 조그마한 선물과 정성껏 쓴 자필 편지로.첫 눈에 반하는 감각 같은 거, 느껴본 적이 없는 미도리에게는 그들의 애정은 이해 밖의 영역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곤란하고, 불편하고, 또 미안했다. 미안해. 나를 왜 좋아해주는지 모르겠어. 처음은 분명 정말 몰라서 그리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잖아? 상황이 계속 반복해 돌아갔다. 나를 왜 좋아해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상대방에 대한 예의,..
https://youtu.be/7SsUG1aJ4Nc 노래 제목을 그대로 인용, 노래 가사를 따라갑니다. 눈을 뜨니 제일 먼저 눈에 밟힌 것은 침대 옆에 펴둔 작은 간이 테이블 위와 그 아래를 굴러다니는 맥주캔과 어젯밤 정사의 흔적들이었다. 침대 벽면 쪽으로 얼굴을 살짝 돌리자 나와 벽 그 사이에 간밤에 흘린 땀으로 젖어 뒤로 넘어간 앞머리칼 덕에 이마를 훤히 드러내놓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아직 꿈 속을 헤매고 있는 네가 있었다. 내 어깨에 기댄 볼이 눌려 조금 튀어나온 입술이 꽤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소리내어 웃는 대신 입을 닫고 눈으로 조용히 웃었다. 아직 잠을 자고 있는 너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네 몸을 받치고 있는 팔을 빼내려 했으나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떨구고 고개를 숙인 너에게 나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이 번갈아 가면서 마시고 삼키는 거라며 너의 잔을 채웠다. 차마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나는 너의 잔이 채워질 때마다 내 잔을 채워 내 입 안으로 한 번에 털어넣기를 반복했다. 너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부럽다. 분명 취해서 솔직하게 내뱉었을 그 말이 고막에 비수처럼 꽂혀 그 뒤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흔들리며 나를 자극했다. 아팠다. "으으.... 선배, 취했어요." 분명 취해 있었을 너는 그 사이에 술이 깬 듯 아무렇지 않게 방향이 같은 나를 부축하려 든다. "괜찮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정말로! 괜찮다!" 왜 하필 너는 이 동네에서 나와 함께 살아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뭍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