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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미네 미도리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잊을 리 없다. 눈이 멀어버릴 듯 위에서 쏟아지는 쨍한 빛 속에서 모리사와 치아키에게 전했던 진심 한 조각을 기억한다. 그날로 마음을 더욱 굳힌 셈이다. 당신을 따라온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고. 자신은 그 1년 동안 많이 변했고, 그 앞으로도 변할 생각이었다.

 

인생에도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미도리가 마음 먹은 것은 그 자신 안의 꽤나 큰 변화를 필요로 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지난날의 자신에게 발이 붙잡혀 멈추어 서 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지켜봐 달라고 떵떵 소리쳐놓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제 상식으로 생각해봤을 때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간혹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린 약한 소리는 그 뒤에 항상 역접의 형태로 나름의 의지를 표하는 말과 언제나 함께했다. 자신이 힘들다는 둥의 소릴 한다 해도 여전하다며 한심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러려니 당연하게 소극적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넘기는 그런 모습보다는 역시 변했구나 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좋았다. 진심이었기에 모두가 진심임을 알아주길 바랐다. 자신은 변하고 있고, 더 변하고 싶었다.

 

자신은 생각이 많은 편이라는 걸 타카미네 미도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교류 없이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생각은 하면 할 수록 꽤나 스스로를 좀 먹게 한다. 동시에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말을 삼켰다. 순리처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속에 쌓이는 것의 부작용을 깨달았다. 더 큰 세상에 나가게 되면서 제 주변 사람에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초면의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잘해야 했다. 과한 관심이 쏠리는 이 자리는 당연하게도 제 스스로의 입단속이 필수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연습이 되어있어 미도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고교 졸업 후, 그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정말 쉬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날에도 미도리는 징징거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름져 느끼하고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음식들을 목구멍으로 쑤셔넣었다. 스트레스를 푼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달랐다. 스트레스의 표출에 가까웠다. 후에 한두 시간 변기를 붙들고 게워내거나, 게워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하루정도 꼬박 배앓이를 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단 음식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열광하는 편도 아니었다. 물리도록 먹으면 도로 올라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걸 알고 그랬다.

 

대부분의 디저트류는 체하기 쉽지 않다. 양이 적기 때문이다. 약은 먹지 않았다. 금방 토하거나 하루 정도 끙끙대며 쉬고 나면 멀끔해졌다.

 

결국 모리사와 치아키에게 타카미네 미도리는 들켰다. 둔한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여러가지로 인한 스트레스성 위염인 줄로만 알고 있던 치아키에게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미도리의 행동과 복통이 명백한 인과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조금 충격이었다. 들켜버린 그날 밤, 미도리는 게워내지 못해 콕콕 위장을 꼬챙이로 쑤셔대는 듯한 복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치아키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치아키가 따뜻한 손으로 배를 쓸었다. 배가 아플 때마다 돌봐주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맨 살 위를 쓰는 손에 질색하던 미도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들통난 날이라 그 날 만큼은 군말 없이 손길을 받았다.

 

미도리의 입장에선 치아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면 완전 거짓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힘들다는 걸 가장 몰라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상대이다. 그래서 말을 아꼈고, 그래서 폭식했다. 견디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 때마다였다는 것을 대충은 눈치챘을 것이다. 그게 부끄러웠다.

 

"이건 자해와 다름이 없다."

 

나직하게 옆에서 타이르듯 말하는 치아키에 미도리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선배는 모를거에요. 선배는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요. 내가 얼마나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는데. 몸으로 시위하고자 했으면 진작에 말로 했을 것이다. 자신이라고 해서 아픈 게 좋을 리 있겠는가. 알아달라고 제가 이런 습관을 들인 건 아니지 않은가.

 

당신도 잠 못 잘 정도로 괴로운 밤이 있을까. 그마저도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삭히려고 발버둥쳤던 적은. 그와 달리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의 가장 큰 원동력이 나와는 절대로 같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그리는 꿈은 미도리에게 있어 부차적인 문제였다. 물론 모리사와 치아키의 꿈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되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그가 원해서 꾸는 그만의 꿈이다. 타카미네 미도리의 꿈은 조금 많이 달랐다. 미도리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따라가고자 한 사람 중 단 한 명을 굳이 꼽자면 모리사와 치아키다. 그렇게 결정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진 사이가 된 지금은 더욱이 그랬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좋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뒤처진다는 생각을 했다. 좋지 않은 습관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이렇게나 빛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따라가야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겨우 동반자라는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당신은 가까이서도 저 멀리서도 빛이 난다. 이런 얘기를 난 당신에게 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나를 곁에서 나란히 달려가는 사람으로 봐주길 원하지 뒤에서 따라가는, 이끌어 주어야 할 사람으로 봐주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도리는 치아키의 곁에서 소리없이, 하지만 서럽게 울었다. 당신에게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이 밤이 지나고, 복통이 잦아들면 또 멀쩡해질 것이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날에 대해서 미도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매일매일이 행복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판타지다. 평화로운 나날을 방해하는 역경이 이런 하루씩만이라면, 당신 곁에 있고 싶은 내게 꽤나 싸게 먹히는 것이다. 그게 어른이 된 자신이 타협한 것이었다.

 

상냥한 모리사와 치아키는 앞으로 더욱 저를 신경 쓸 것이다. 그건 정말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모리사와 치아키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한 번씩 제 늪에 빠지고야 마는 타카미네 미도리처럼 모리사와 치아키도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과민하게 반응해 타카미네 미도리를 곤란하게 만들곤 한다.

 

 

*

 

 

모리사와 치아키는 그날을 기억한다. 타카미네 미도리가 내비친 진심은 무대 위에서 자신을 울게 만들었다. 후에 모리사와 치아키는 깨달았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제 신념조차 침범할 수 없는 오롯한 욕심 위에 세워진 성역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제 이기심에 충격받을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그 사실이 제 가슴을 벅차오르게 해 뻥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도리는 치아키에게 언제나 예외적인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무던히 애썼다. 해가 거듭될 수록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결과적으로 치아키의 욕심은 현실을 상대로 승리해서 타카미네 미도리의 가장 가까운 곳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주체 없이 날뛰던 감정의 고삐를 느슨히 하고 한숨 돌리려던 치아키는 제 욕심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그는 미도리를 상상 이상으로 욕심 냈다.

 

자신이 매번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미도리도 둘 사이의 무언가를 위해 애쓰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실체를 목격한 치아키는 자해라는 말을 입에 담았고 제 앞에서 조용히 오열하는 미도리를 보며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았다. 왜 너는 너 자신을 막 다루는가. 왜 너는 내게 말해주지 않는가.

 

미도리 그 자신만이 건드릴 수 있는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치아키는 그 마저도 욕심을 냈다. 물론 내어놓을 수 있는 속내는 아니었다. 치아키는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소리 없이 눈물만 쏟아내는 그를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입안이 썼다.

 

불쑥불쑥 드는 생각이다. 지쳐서 네가 내 곁에서 떠나면 어떡하지. 적어도 무엇에 지친 것인지 내가 알아야 무언가 조치를 취할 것 아닌가. 하지만 또 안으면 안는대로 제게 기대 오는 모습을 보면 불안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오른다. 순간 저 멀리 도망가버렸다가도 결국 제 품 안으로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자신이 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상냥한 타카미네 미도리는 모리사와 치아키가 욕심을 부려도 대부분 모르는 척 받아준다. 그것이 못내 기쁘다. 그러니 제 욕심도 두어개 정도는 눈감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리사와 치아키가 타카미네 미도리를 아무리 욕심낸다고 한들 결국 제 욕심이 타카미네 미도리 그 존재 자체를 넘어설 리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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