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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어도 나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얹어주는 부담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테니까. 나는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고여있을 것이다. 남에게 폐끼치기 싫어 움직이는 삶이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라면 진작에 썩어버릴 때까지 멈춰있었을 것이다.
어영부영 어떻게든 이어붙여나가던 인생이 조금씩 주춤대더니 기어코 멈추고 말았다. 이유는 주변 모두의 납득이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죽고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타카미네 미도리라면 더욱.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향해 쏟아질 질책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실망한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굳이 미움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생긴 자유에서 오는 것은 해방감 따위가 아니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죽지 말아달라는 소리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정말로 멈춰서버렸다.
남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싫어서 미적대며 앞으로 찔끔찔끔 움직였다. 가끔 뛰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정말 가끔.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움직였다 한들 그 끝에서 펼쳐지는 세상은 정말 멋졌다. 얼른 뛰어들어봐! 분명 네가 좋아하는 엉성한 봉제인형들처럼 보드랍고 따뜻할거야! 좋은 향도 날 걸? 과연, 좋은 것들이 차고 넘쳤다.
좋아하는 것도 있으면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건 남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나 자신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행복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엎어져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면 좋은 향이 났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짧은 행복을 급하게 들이마신 나는 켈룩대며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 좋은 풍경은 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등 뒤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있고 또 다른 행복,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역시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발을 옮겨야 했다. 내 의지가 있었나? 좋은 세상은 질질 끌려갔던 시간을 잊게 해주었지만 그 앞뒤로는 항상 질질 끌려가는 그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이 나는 힘들었다.
나를 끌고가든 뒤에서 밀어붙이든, 그러는 사람이 단 한명도 남지 않게 되어서 나는 그저 한 자리에 서서 고여갈 준비를 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난 이제 그냥 가만히 있어도 괜찮다.
영웅이 나오는 픽션이 싫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모두의 영웅이 아등바등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싫었고 모두를 죽이더라도 저만큼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악인도 싫었다. 내겐 그런 숭고하거나 저열한 절박함이 없었다. 나는 핑계가 필요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겠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체념이 가능한 상황에 처하고 싶었다. 그 누가봐도 절망뿐인 상황이라서 멀쩡하게 살아있기를 포기하는게 당연한 상황이 된다면, 무너지고 싶은 심리에 대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건 정의를 구현하려다 망가져버리는 소년 영웅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삶에 열성적이라서 무너지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면 가끔 짜증이 난다고 해야하나. 너무나도 안온한 일상에서도 모든 걸 내팽개치고 주저앉아버리고 싶어해서 비정상 판단을 받는 내겐 없는 완벽한 면죄부가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죽어라 살고자 하는 걸까. 살아있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오늘 나의 선배라는 사람을 만났다. 스쳐지나가는 나를 보고 그는 내 성을 불러 나를 멈춰세웠다. 이상했던 것은 나는 이제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고 그 또한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둘 다 녹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학교의 자랑거리인 아이돌과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나는 일반과 학생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타카미네 타카미네하고 불러대는 그 사람을 나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나를 아는 것 같았다.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던 그는 나를 데리고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애매하게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이었던터라 식사가 될 만한 음식은 시킬 수 없었던 건지 그는 사이드메뉴만을 시키고 내 건너편에 앉았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눈은 내 넥타이를 보고 있었지만 내 위로 누군가를 겹쳐보는 듯 했다. 아마 자신이 알던 타카미네를 보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는 중간에 갑자기 질문을 멈추고 내게 역시 상냥하다는 말을 했다. 상냥하다는 건 나를 정의하기엔 과분한 말이다. 나는 그저 게으를 뿐이다. 나는 처음보는 것과 다름없는 내게 과할 정도의 호의를 보이며 잘해주는 그에게 못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가 아는 타카미네는 아무래도 나와는 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들렸으니까. 나는 마음의 빚을 지는 것이 더 껄그러웠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냥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여태 시간을 쓰며 살아왔다. 난 상냥한게 아니에요 설명하는 나를 지켜보던 그는 조금 불편해보였다.
그가 말한 나의 고등학교 입학 전 모습의 일부는 정말 옛날의 나였다. 하지만 나는 아이돌과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와 닮은 선배를 둔 적도 없다. 그는 내게 곧 졸업인데 무엇을 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이미 멈춰버린 나는 미래에 대해서 그닥 고민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 역시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뭐라도 말하며 맞장구라도 쳐주고 싶었지만 정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침묵했다.
그가 알고 있는 타카미네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난 뒤 정말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된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와 다른 타카미네는 히어로가 되어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가 내게 히어로가 싫냐고 물었다. 이상한 표정까지 지어놓고 좋아한다고 거짓말까지 칠 이유가 없었던 나는 허구의 이야기 속 존재하는 히어로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답했다. 그가 이유를 물어도 괜찮은지 내게 허락을 구했다. 히어로를 동경한다고 이야기했던 그의 앞에서 구구절절하게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도 일이라 또 한번 침묵했다. 소재에 대한 호불호 정도야 말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내 무기력함을 처음 만난, 다시는 만날 일 없는 그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꽤 오랜시간이 지나고 대화는 끝이 났다. 패스트푸드점 안에서 그는 자기 소개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집요하게 나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그는 조금 울었다. 네게 있어 나와의 만남이 의미있는 것이었음 하는 욕심에 이런 못된 망상까지 했다며 미안하다고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말하는 상대방이 내가 아닌 그가 아는 타카미네임을 알 수 있었다. 헤어지기 직전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힘이 실린 팔로 내 등을 두어번 쳤다. 그는 내게 내 안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비유적인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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