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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와 치아키가 악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악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정의는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 그럼에도 모리사와 치아키가 믿은 것은 결국 정의가 그 모든 것에 있어 승리하리란 사실이었다. 소년은 사람들을 믿었다. 운 좋게도 그는 고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 믿음이 흔들릴 만한 일을 겪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히어로를 표방해 명맥을 유지해온 아이돌 유닛에 들어가 마주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악의였다. 악의에는 그럴듯한 이유조차 없었다. 이유없는 악의에 치아키는 자꾸만 작아졌다. 치아키가 유닛에 들어오기 전의 티 없는 꿈의 일부 같았던 대장은 떠났다. 그래도 저보다 높은 곳에서 시작해 계속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동급생은 돌연 사라졌다. 홀로 남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유닛을 떠맡게 되었다. 유닛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메노사키학원은 부패했고 나름대로 자정을 위해 노력하던 친구들은 치아키의 이상과는 달리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다른 이들을 미워한다. 치아키에게 유닛 멤버들이 그랬고, 학생회의 뜻대로 움직이는 대중이 그랬다. 치아키는 그래서 헤맸다. 십 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세계에서 쌓아온 사람에 대한 신뢰가 2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속에 바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버티기만 해서 지나가는 암흑기가 아니었다. 무언가 해내야만 하는 위치에 서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 없었다.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엉뚱한 곳으로 칼을 휘두르는 친구들과 스러져가는 친구들 옆에서 무기력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약해져 있던 후배는 제 약한 모습에 실망했다. 결국 정의는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나는 정의로운 히어로인가.

하지만 히어로는 도움의 손길을 뻗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던대로 누군가 필요로 하여 저를 부르면 달려 나가는 히어로가 되었다. 히어로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원했고 동료도 생겼다. 그러나 나약함에 대한 깨달음은 상흔처럼 남았다. 나약함이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강하지 못해서 손 놓고 볼 수밖에 없던 그 시절이 사실 모리사와에게는 조금 아팠다. 또 나약해서 제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이해했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람들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이어져있었다. 여전히 정의를 숭상하는 소년은 거친 방법으로 강하게 성장했다. 지키는 것은 유지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신도, 세상도 변할 수 있다면 변해야 했다. 

 

타카미네 미도리가 아이돌 육성 학원의 아이돌과에 진학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리고 모리사와 치아키가 그를 발견한 것까지도 우연이었다.

 

"너, 농구부에 들어오지 않겠나!"

 

모리사와 치아키가 타카미네 미도리를 붙잡아 농구부 입부를 권유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치아키와 같은 학년과 바로 그 밑의 학년이 겪은 일은 보통의 고교생들이 겪기엔 결코 평범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세상은 유메노사키 학원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또 대체적으로 관심도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학교 바깥으로 별다른 이야기가 새 나가지는 않았다. 여전하게도 유메노사키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아이돌이라는 단어는 선망이라는 단어와 함께 붙어 다녔다. 그런 아이돌과에 입학하게 된 신입생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부정적 감정은 두려움, 긴장 정도였기 때문에 미도리에게서 느껴지는 우울함은 이질적인 것이었다. 치아키는 그걸 지나칠 수 없었다. 치아키는 미도리를 지켜보고 싶어졌다. 도울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우울의 원인을 당사자에게 직접 듣게 되었을 때 치아키는 조금 놀랐다. 미도리의 얼굴을 보니 행정처리를 기계가 오롯이 도맡아 하지는 않았을테니 신입생 관련 업무를 맡았던 누군가가 실수를 할 만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침울해하는 얼굴에 제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해주지는 못하고 대신 정말 잘생겼다는 짧은 문장으로 정리했더니 질색하는 표정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계속 다닐 생각이지? 이 학교. 치아키는 홀린 듯이 다시 한번 입부를 권유했다.

 

"유성대에 들어오지 않겠나."

 

이를 시작으로 농구부 건 때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어오는 치아키에게 당해내지 못한 미도리가 마지못해 유성대의 일원이 되었을 때 유성대에는 유성 레드, 블루, 옐로와 그린 4명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성 블랙이 합류하게 되면서 치아키가 염원하던 5인 유닛을 완성하게 되었다.

 

미도리는 은근히 입이 험했다. 치아키는 그걸 굳이 분위기를 잡아 고치게 하지 않았다. 지내다보니 덩치와는 달리 여린 편이란 걸 자연스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치아키는 이런저런 일을 겪은 뒤로 공격적인 태도가 방어의 의미 역시 지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건 좀 상처구나하고 하하 웃으며 넘겼을 뿐이다. 실제로 미도리의 가시 돋친 말은 치아키에게 그리 큰 상처를 주지는 않았다. 치아키가 걱정한 것은 자학에 가까운 언사들이었다. 미도리는 사소한 불편함에 대해서는 치아키에게 툴툴거렸으나 정작 문제가 커지면 그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도망가버리면서도 자책하거나 자리를 지키면서도 제가 왜 여기 있나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우선적으로 치아키가 유성대의 리더로서 미도리에게 바란 것은 무대 위에서 빛날 유성 그린으로서의 성장이긴 했지만 그것이 당사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치아키는 기왕 아이돌을 하게 된 미도리가 함께 무대 위에 서서 저와 같은 풍경을 보며 비슷한 것을 느끼길 바랐다. 개성 강한 다섯 명의 멤버들이 일체감을 느끼며 성공시킨 유성대의 첫 라이브 뒤에도 미도리는 아이돌이라는 자신의 일에 종종 거부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 이유는 미도리의 개인사에 있었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사랑받는 것이 두려웠다. 애정이 무서운 이유는 그 양면성 때문이다. 대개 가족을 제외하고 제게 애정을 가졌던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었다. 환상 속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든가, 당사자인 미도리로서는 알 수 있을 리 없는 정해진 선을 넘어버리면 사랑은 곧장 실망으로 이어졌다. 사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이 무서운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쯤되니 관심 자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어쩌다 보니, 잘도 아이돌 일을 해내고 있구나 싶어 지는 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충 같은 유닛의 3학년 선배들이 지난 2년동안 순탄치 않은 학교 생활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 범위 내 사람 외엔 크게 관심 없었지만 유성대의 사람들은 제게 있어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었다. 어영부영 끌려다닐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기 와서 많이 변한 만큼, 그 1년 동안 학교는 많이 변했다. 그 모든 과정을 겪어온 선배들은 무대를 정말 사랑하는 듯 보였다. 자신의 팬들을 사랑했다. 선배를 따라 다른 둘도 그런 태도에 감화되는 듯했지만 미도리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멤버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던 미도리는 유성대가 유성대로 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수많은 팬들이 고마웠지만, 관객이 두렵기도 했다. 사실, 누군가에게 우상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는데. 내가 과연 저 많은 사람들의 애정에 부응할 수 있나.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던가.

 

치아키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상반된 두 감정을 내보인 사람이 없었다. 그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인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치아키는 애정의 양면성을 알고 있었다. 친구에게 돌연 등을 돌려버린 대중의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악의에 시달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치아키를 편하게 여기게 된 미도리가 치아키에게 유독 거친 말을 쓰는 이유도, 사람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다가도 쉽게 싫어해버리는 이유도. 심적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든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이나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세우곤 한다. 치아키는 나름대로 미도리를 이해했다.

 

언젠가 닳아빠진 모리사와 치아키가 닳아빠진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말했다.

 

"타카미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는 것은 자유다만 그것에 대해서 네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네가 아이돌로서 해야할 일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는 것이 아냐. 나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떠맡으라고 네 손을 잡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다오. 그냥 타카미네는 타카미네로 있으면 된다."

 

"선배는 모두를 사랑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같을 수 없다는 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 무대에 서는 일이 너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내게 말해다오. 괴롭지 않을 방법을 같이 찾아주겠다."

 

"그런 건 아니에요."

 

"타카미네는 상냥하니까. 그래도 유성대 무대를 좋아하지? 이젠 타카미네도 어엿한 히어로가 되었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치아키는 토라진 아이같은 얼굴을 한 미도리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미도리는 치아키가 모든 걸 저 좋을 대로 해석한다고 투덜댔다. 치아키는 아무래도 좋았다. 입으로는 툭툭거려도 얌전히 머리를 제 손에 내어주는 미도리는 무대가 끝난 뒤 무대 뒤편에서 모두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유성대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이 널 좋아하는 것이 자유인 것처럼,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자유니까."

 

좋은 선배로서 아끼는 후배의 마음의 무게를 덜어주려 덧붙인 말이 왜 그리 따끔거렸는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던 모리사와 치아키로선 알 수 없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번개처럼 깨닫지 못한 쪽이었다.

미도리는 자신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치아키가 해준 그 말이 좋았다. 한번도 상냥하게 이야기해주지 못했지만 선배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치아키는 제가 건넨 말에 속박되어버렸고, 미도리는 예전부터 저를 속박해오던 부담감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졌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세상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할 수 있고 또 긍정적으로 변한다. 미도리를 세상과 동일선상에 둔 모리사와 치아키가 순수하게 감동했다. 미도리 외에도 학교는, 다른 주인공을 내세운 유메노사키의 두 번째 혁명은 성공했고 나아가 아이돌 업계는 과거의 과오를 청산하는 듯했다. 그 뒤로 치아키는 학교를 졸업했다. 

 

미도리의 앞으로 치아키 없는 2년의 학교생활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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