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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모금만 더 마시면 난 죽을 거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모리사와 치아키는 술집에 딸린 화장실 안의 세면대 위 거울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분명 술 깰 겸 물 좀 묻히려 했던 것 같은데 깜빡깜빡 곧 점멸할 듯한 의식 사이로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 결과, 몸엔 물 한 방울 안 묻어있고 저는 고개를 밤공기에 시원해진 거울에 이마를 대고 진탕 술에 절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숨이 거울 표면을 타고 도로 제 얼굴로 올라와 다시 한 번 더 코로 술을 마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자 간신히 이마를 거울로부터 떼어내었다. 이 정도로 마시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본 동창들의 얼굴에 신이 나기도 했지만 긴장이 완전히 풀려있던 모양이다. 집에 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저를 기다리고 있을 동거인을 떠올리자 술이 좀 깨는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바로 앞에서 콸콸 쏟아지고 있는 수돗물도 아득하게 들려오는 와중에 발걸음을 옮겨도 비틀대다 발이 꼬여 넘어지지 않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합석할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 술을 더 시키며 막차가 끊길 시간까지 동창들을 붙잡아 놓은 것은 본인이라는 사실이 현재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몸뚱아리의 주인을 매우 민망하게 만들었다. 일단 애들도 보내야 하고 정신차리자. 온갖 잡음이 고여 잔잔히 회오리 치듯 웅웅대는 고막과 여기저기 보이는 노란 빛 무리가 이리저리 춤추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 시야에 술기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부릅 뜬 눈을 고정하고 비틀대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음을 옮겨 다시 자리로 돌아온 치아키는 화장실에 전세 냈냐며 걱정 섞인 타박을 들으면서 자리를 급히 정리했다.
_딸깍
타카미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선배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맘 편히 자요. 지금 어디에요?]
아 미안 미안, 난 지금 택시에서 내렸다.
[그럼 집 앞?]
아니, 그래서 전화한 건데. 이쪽 지리가 밝지 않으신 분인지 주소를 말씀 드려도 잘 모르시더구나. 그래서 그냥 내려주시는 데서 내렸는데 좀 걸어야 할 것 같다.
[어딘데요?]
으음. XX역 앞이다.
[엄청 멀잖아.]
술도 좀 깰 겸 걷는 거다!
[술 취한 사람이 지금 이 시간에 걷는다고? 그냥 택시기사 분께 주소 다시 알려드리고 제대로 끝까지 타고 오지… 위험하잖아요. 날도 덥고.]
그래서 타카미네한테 전화하고 있지 않나! 만약 내가 40분 뒤에 도착하지 않으면 신고해줘! 그리고 많이 안 취했다! 지금 혀도 안 꼬이는데.
[지금 취했다고 되는대로 내뱉는 거에요? 완전 막말하네. 데리러 나갈까요?]
아니야 아니다 나오지 마라. 덥다!
[후… 그럼 전화 끊지 말고 도착할 때까지 나랑 이야기해요.]
어.. 타카미네 졸리지 않나?
[선배 덕에 오던 잠도 다 날아갔어요.]
미안하구나…하하 타카미네에 미안해애-
[됐어요, 길거리에서 밤 중에 소리치지 말고. 오늘 재미있었어요?]
응! 재밌었다! 다들 오랜만에 본 얼굴들이고, 다들 즐겁게 잘 사는 것 같더구나! 아 맞아, 혹시 모르니까 기억해둬라! XXXX, OOO…
[잠깐잠깐, 무슨 번호인데요?]
애들 택시번호다!
[…]
응? 타카미네? 끊었나?
[선배가 타고 온 택시번호는 알아요?]
어… 그러게 그건 확인 안 했구나.
[제가 무슨 말 할 것 같아요.]
푸흐흐
[아 왜 웃어요.]
아 그냥 타카미네가 너무 좋아서. 항상 고맙다.
[윽.. 빨리 오기나 해요…]
사랑한다 타카미네에에엑
[아 소리치지 말라고!]
아하하, 아아 지금은 여기 OO세탁소를 지나가고 있다!
[으음… 반쯤 온 건가?]
근데 왜 이렇게 소리가 울리지? 내가 취해서 그런건가. 타카미네 소리가 울린다.
[어… 화장실이에요.]
…음? 그런가. 그.. 뭐냐 민망하게 거, 볼일 음, 볼 때도 나랑 통화할 필요는 없다만.
[뭐래. 볼일 보는 거 아니거든요.]
…어엇, 미안하구나. 아니 그리고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 아니라ㄴ]
음? 타카미네? 어엇.
치아키는 전원이 꺼져버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타카미네와 이렇게 통화하면서 걷는 것도 기분 좋았는데 어쩔 수 없지. 그보다 그냥 끊겼는데 걱정하면 어쩌지. 저를 걱정하고 있을 사람이 도리어 걱정되어 치아키는 술기운에 차마 달릴 엄두는 내지 못하고 힘 닿는 데까지 속도를 높여 요란한 발소리를 남기며 따박따박 걸었다.
“타카미네!!”
“우왁!”
집 앞에서 어렴풋이 실루엣이 보이자 치아키는 앞뒤 가리지 않고 여전히 평소와는 다르게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그 실루엣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윽… 술냄새…”
“으흐흐…”
아슬아슬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제 몸을 꽉 붙든 연인에게 치아키는 내키는 대로 팔을 들어 상대의 목을 끌어당겨 안아 코를 비비며 웃음을 흘렸다. 열 걸음 정도 큰 보폭으로 뛰었을 뿐인데 긴장의 끈을 확 놓아버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취한 몸을 크게 움직여서 그런 걸까,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풀쩍풀쩍 뛰어왔던 열 걸음의 그 순간처럼 빙글빙글 돌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비비적거리고 있어도 제가 달려가 안기는 그 순간 풀썩 제 코로 밀려들어 오는 초목이 우거진 숲에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 밑에서 짓이겨져 다리와 상체를 빠르게 타고 올라오는 산뜻하면서도 톡 쏘는 듯한 풀내음과 같은 체향 덕에 제가 생각한 그 사람이 맞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괜히 얼굴과 목 그 언저리를 맴돌며 더 킁킁거리자 끌어안고는 있는 두 팔을 풀어내진 않지만 아무 말 없이 머리위로 수차례 흩어지는 숨이 무거워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푸우우우-“
“어윽, 선배 일부러 그러는 거죠.”
일부러 숨을 얼굴을 맞댄 채로 불어대자 질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목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올라와 불어 대던 알코올 범벅인 숨을 커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구멍 뒤로 넘겼다. 지금 앞이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 한심해하면서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고있겠지. 그래서 그런데,
“키스해도 되나?”
“저 양치했는데요.”
“하게 해줘…”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제 입술에 와 닿는 감촉이 좋아서, 그대로 입을 벌리고 팔에 힘을 주고 세게 당겼다. 순간 저와는 달리 확 풍겨오는 상쾌한 민트향에 약간의 죄책감이 일었으나 뭐어, 허락받은거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혀를 섞었다. 완전히 힘이 빠져 자꾸만 흘러내리는 저를 어떻게든 붙잡고 목도 한껏 아래로 숙여 입을 맞춰주는 애인은 무척이나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짧지만 알코올의 잔재에서 여전히 헤엄치는 의식 덕에 시간감각을 상실한 치아키에게는 꽤나 길게 느껴졌던 입맞춤을 끝낸 미도리는 말했다.
“얼마나 독한 술을 마신거야. 엄청 써.”
미도리는 치아키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와 옷을 벗고 욕조 안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얼른 거기 앉아봐요.”
“목욕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가! 타카미네, 변ㅌ”
“헛소리 하지 말고 여기 기대요. 머리 내 쪽으로 해서.”
“아까 화장실서 물을 미리 받아놓은 건가… 감동이다 타카미네…”
“샤워하다가 머리 깰까 봐 걱정돼서 말이죠.”
“으윽, 평범하게 좀 더 감동할 수 있었는데! 내 감성은!”
“말이 많습니다 선배.”
“왜냐면 지금 생각나는 대로 막 떠들고 있거든!”
“머리 안 울려? 눈 감아요.“
선배 나한테 오늘 엄청 빚진거야. 이런 서비스를 언제 받아보겠어.
맞다! 타카미네 미도리가 머리 감겨주는 남자는 나 밖에 없겠지! 우하하!
여기 소리 울리니까 그렇게 크게 웃지 말아주세요.
“선배 자면 안돼요. 일어나.”
“으어… 그냥 여기서 자면 안되나…”
“얼씨구.”
찬물을 정성스레 얼굴에 쏟아붓는 미도리 덕에 치아키는 몸을 퍼드득 떨며 욕조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아까보다는 좀 더 정신이 들었죠? 물기는 선배가 닦아요.”
“음! 고맙다.”
건네 받은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낸 치아키가 선반에 놓여있던 속옷과 티쳐츠를 챙겨입고 화장실을 어기적 벗어나려하자 미도리는 그 손목을 잡아채어 세면대 앞으로 끌어다 놓고 치약을 묻힌 칫솔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렇게 반쯤 감은 눈으로 함께 다시 양치질을 하는 미도리에게 기대 느릿느릿 양치질을 끝마친 치아키는 화장실 문을 나와 침실로 들어가 곧장 침대로 엎어졌다.
엎어져 얼굴을 이불에 파묻고 웅얼거리는 치아키의 머리를 미도리는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타카미네… 술냄새가 너무 심하다… 목구멍 타고 자꾸 올라와…”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까… 속은 괜찮아요?”
“아니… 사실 아까 양치하는데 토할 것 같아서 힘들었다…”
“아까 부엌에다 꿀물 타 놓긴 했는데 가져다 줄까?”
“응…”
꿀물을 한 입에 털어 넣은 치아키로부터 컵을 받아 싱크대에 두고 온 미도리는 방의 불을 끄고 여전히 엎어진 채로 꾸물거리며 베개위로 다시 얼굴을 처박는 치아키가 있는 침대에 자신의 몸도 구겨 넣었다.
“이제 자요.”
“음…”
“잘 자요.”
“타카미네”
“응.”
“진짜 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폐 끼쳐서 미안하구나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뒤통수를 미도리는 말없이 바라보다가 살살 쓰다듬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죠. 폐라고 생각 안 해요. 선배도 그렇잖아.”
이 나이까지 와서 선배가 이러는 모습 볼 수 있는게 나 말고 누가 있겠어요, 그죠? 텐션도 오락가락-
으응, 그건 그런 것 같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잡아 그대로 제 입술에 가져다 대고 쪽쪽 거리자 앞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진짜 자요.
응. 자자.
치아키는 연인의 손바닥에 코를 박고 오래 전부터 깜빡거리던 의식을 놓아주었다.
다시는 없을 술주정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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