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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우리 헤어질까요.”

모리사와 치아키는 타카미네 미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카미네 미도리는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생각해왔어요. 저희 그래도 굉장히 긴 시간을 연인으로서 사귀었잖아요. 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요. 사랑받고 있다는 걸 항상 느끼니까.
근데, 나는 항상 선배를 필요로 하지 않아. 매순간 보고싶어하지 않아요. 선배의 지인들은 전부 나를 알고, 항상 나를 보면 모리사와 치아키가 널 끼고 다니지 못해 안달이다 라는 말을 해요.
그런데 내 지인들은? 선배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나요?
아니야. 매순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모리사와 선배를 싫어하는 건 아냐. 그래도 떠오를 때마다 좋은 걸. 근데 선배, 그건 선배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부모님을 떠올려도, 형을 떠올려도, 내가 아끼는 소중한 친구들을 떠올려도, 하다못해 사람은 아니지만 유루캬라를 떠올렸을 때 역시 제 안에 들어차는 것은 좋은 감정이라구요. 다 좋아하는 사람이고, 대상이니까. 물론 대상에 따라 그 느낌은 조금씩 다르죠. 그래도 말이에요.
선배가 나에게 주는 애정의 크기와 내가 선배에게 주는 애정의 크기의 차이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나, 나는 분명 선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확신이 없어졌어요. 이 정도의 호감만으로도 연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마다 괴리감을 느껴요. 왜 이러지. 나는 진짜 선배를 좋아하거든요. 사랑하는데.
선배, 내가 하는 이야기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요? 계속 쳇바퀴를 도는 듯한 말을 하는데 미안해요, 분명 이 말들을 하기 위해서 정리를 해왔는데 막상 선배 앞에 서니까 그게 잘…
나는 그래도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절대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무의식적으로 그래왔더라구요. 소중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고 싶어하지 않아하긴 했죠.
나는… 나는 어쩌면 나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사람 중 가장 주축인 당신을, 정말 소중한 사람 중에 한명인 당신을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선배가, 모리사와 치아키가 나로 인해 힘들어 할 걸 아니까. 너무 오만한 생각인가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되어서, 상처 받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그게 무서워서 내가 선배를 사랑하고 있다고, 성애적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게, 너무 다르잖아요. 우리의 애정의 양상이 너무 달라요. 이걸 동일선상의 감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나는, 정말 선배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사실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 내가 나 자신조차 속이고 있는 거면 어떡해요? 그리고 이런 나한테 선배 역시 속고 있는 거라면? 나는… 나는 선배를 진짜로 좋아하고 있는 걸까. 애초에 이런 의심을 하게 되는 것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전 선배가 행복했음 좋겠어요.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곪을대로 곪은 뒤에 거짓 껍데기 밑의 썩어 빠진 진실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의심의 싹이 텄을 때, 그 안을 들여다보고 뿌리까지 없애버리는 것이 선배에게 좋지 않을까.
사실 내가 힘든가봐요. 내가 왜 힘이 들까요. 나는 좋아한단말이야. 왜 힘들지? 선배한테 사랑받고 있는데 왜 힘들죠? 너무 이기적이라 죄송해요.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행복한 나한테 취해있는 거면 어쩌지. 그게 허상이라면 어쩌지. 내가 바라는 모습이라 그저 그걸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면. 서로 좋아하는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던 거라면.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또 나를 위해서. 어떡하지. 나는… 나는…

“타가미네,”
울지 마라.

울고 있었다. 목소리도 전혀 떨리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끊임없이.
더 이상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리며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사람의 앞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저를 좀 먹는 기나긴 생각 끝에 맞이한 고해 성사의 시간이었다.
후련한가?
후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너무 슬펐다.
지은 죄가 너무 커서?

“타카미네는 날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제서야 앓는 듯한 울음소리가 목구멍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는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 달리기 속도도, 심장이 뛰는 속도도, 그 모든 속도가 다른 것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속도와 스타일이 있는 것이지.

이제는 목 놓아 우는 미도리를 치아키는 끌어 안아주었다.

감정에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나. 그냥 너도, 나도 행복하면 되는 거야.
모리사와 치아키가 타카미네 미도리를 사랑하는 법과 타카미네 미도리가 모리사와 치아키를 사랑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서로 사랑해서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행복한 너에게 취해 있다면, 이보다 기쁠 수가 있나. 나를 사랑해서 행복하다니 영광이다.

“그리고 나도 너를 사랑해서 행복하다.”

다시 한번 또 이렇게 선배와 함께 성장통을 겪는구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손이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그리고 그게 너무 좋아서 마지막 눈물 한방울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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