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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우와, 완전 아저씨같은 감탄사”
“음- 아저씨라면 아저씨라고 할 수도 있지 않나!”
“... 뭐, 아저씨라고 정의할 수 있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선배 얼굴 보고 아저씨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딱 잘라 이야기하는 미도리 앞에서 치아키는 푸슬푸슬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아직 반쯤 차 있는 맥주캔을 얼굴에 가져다대었다.
“으아- 역시 덥긴 덥구나. 맥주도 금방 식는 것 같다!”
모리사와 치아키와 타카미네 미도리는, 열대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치아키는 냉방기구에 약했다.
에어컨을 들여놓기는 했으나 제습의 용도로만 주로 사용할 뿐 냉방으로는 잔기침을 하고 코를 훌쩍이기 시작하는 치아키 덕에 30분 이상을 틀어 놓을 수가 없었다. 일하는 곳에서는 냉방을 빵빵하게 해두지만, 그만큼 치아키의 활동량이 어마무시했기 때문에 괜찮다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집 안에서 에어컨으로 온도를 낮추지 못해 죽어가는 것은 안그래도 열이 많은 치아키 자신이었다.
“타카미네에... 덥다아.....”
“저도 덥거든여.... 으악 달라붙지 말아요!”
미도리는 치아키만큼 더위를 타지 않았다. 비교하자면 그렇다는거지, 에어컨 없는 열대야는 미도리에게도 고역이었지만 동거인이 훌쩍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그 동거인과 함께 어떻게든 선풍기로 연명해보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나날이었고, 이 날도 둘은 어찌저찌 맥주를 한 캔씩 비운 뒤 잠을 청했더랬다.
‘이 새벽에 무슨...?’
중간에 목이 말라 눈이 떠진 미도리는 비워져 있는 제 옆자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옆이 허전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집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옆 스탠드에는 심지어 핸드폰 두 개가 그대로 충전기에 꽂혀있었다.
자신의 휴대폰을 충전기로부터 분리시키자 액정 위로 떠오른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던 사람이 그낭 사라질 수가 있냐고....!’
2시 43분이었다.
지갑도 안 가지고 나갔어.
미도리는 당황스러웠다. 밖에 나간 것 같은데 휴대폰도 지갑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어.
근데 그 사람 이어폰이랑 MP3플레이어가 없어.
진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일단 나가봐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미도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 밖으로 나오니 덥고 습한 바람이 미도리를 한번 휘감고 흩어졌다.
해가 져도 이렇게 밖이 덥다니... 진짜 싫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퍼뜩 떠오른 사실이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제 동거인은 이런 더운 여름에도 해가 진 뒤라면 공원이나 운동장을 뛰고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마자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최악의 가정들은 흩어져 사라지고 어디로 가야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지에 대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항상 책상위에 놓여있던 MP3플레이어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확신을 더했다. 그렇게 확신에 찬 발걸음을 옮긴 타카미네 미도리가 도착한 곳은 집 근처의 공원이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뜨거운 햇빛이 땅 위로 내리쬐는 날씨인 만큼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사람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서서히 어둠이 내려올 때 즈음이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꽤나 넓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복작복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공원이었다. 그리고 똑같은 어둠을 품고 있지만 활기를 띤 자정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공원이 새벽 3시, 그 곳을 찾은 미도리를 반겼다.
"..."
진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 설마 내가 자고 있을 때 가끔 이렇게 나와서 일탈아닌 일탈을 즐겼다든가...
어이없음에 입을 벌리고 서있던 미도리의 시선 끝에는 뛰는 것인지 춤을 추는 것인지 구분 할 수 없는 인영이 맺혀있었다.
덥지도 않은걸까, 집에서 개마냥 바닥에 늘어져서 혀 빼물고 헥헥 거릴 때는 언제고 얼마나 신났으면 저리 몸을 움직여대고 있는 건지. 미도리는 한숨같은 숨을 흘리며 인영을 좇아 몸에 힘을 빼고 흐느적흐느적 걸음을 옮겼다. 지척에 사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어폰을 낀 채로 제 세상에 빠져서 흥얼거리며 앞뒤로 옆으로 스텝을 밟는 치아키를 미도리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 자리에서 콩콩 뛰더니 양 팔을 젖히고 앞으로 달려나가는가 하면 뚝 멈춰서더니 그 자리에서 팔과 다리를 크게 휘두르며 몸을 흔든다.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자니, 빛이란 빛은 다 끌어 모아 뿜어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커먼 어둠속에서 불빛이라고는 희미한 달빛과 새벽이라 그런지 몇개 켜져 있지 않은 가로등이 전부인 이 곳에서 그 희미한 빛 마저도.
평소에 뿜어내는 에너지를 빛으로 형상화한다면 택도 없는 양이었지만 어쨌거나 빛나고 있었다. 습한 공기에 맞닿은 땀에 젖어 반들거려보이는 팔이 은은하게 흰색 빛을 뿌려대며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그에 시선을 두고 있던 미도리의 정신을 흐트러놓았다.
멍하니 그 빛의 잔상을 따라 팔을 뻗어 잡아채려하니, 때 마침 팔을 앞으로 내지르던 치아키 덕분에 미도리의 몸도 함께 앞으로 기울었다.
"엑-"
"으헛! 어라, 타카미네?"
자신의 몸 위로 무너져 내리는 미도리의 몸을 단단하게 받아 자신도 함께 무너지는 걸 막아낸 치아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도리를 불렀다. 시원해 보이던 하얀 빛과는 달리 맞닿은 몸은 당연하게도 더운 김을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사실 빛이 아니라 뜨거운 김이 보였던 걸까?
"타카미네, 여긴 어쩐 일인가!"
"저야 선배 찾으러 나온거고. 선배는 이 시간에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덥다고 잠도 못 자던 사람이"
이어폰을 빼며 좀 전의 움직임 때문인지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 치아키에게 투명스럽게 대답하는 미도리의 눈에는 제게 반가움과 의아함이 섞인 눈빛을 보내는 제 연인이 있었다.
"말 그대로 잠이 안와서 말이다. 그냥 갑자기 나와서 뛰고 싶어져서 나왔다!"
"이 날씨에?"
"응, 이 날씨에."
그러게 말이다 하며 눈꼬리와 입꼬리를 휘어 웃어보이는 치아키를 보며 미도리는 눈썹을 모았다가 이내 표정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치아키의 웃느라 반쯤 감긴 눈에서는 크리스마스 아침날 트리 밑으로 달려오는 아이의 기쁨과도 같은 반짝임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선배"
"응!"
"좋아요?"
"음!"
"뭐가 그렇게 좋아요?"
"으흠.."
그냥 다 좋은데, 거기다 타카미네까지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행복해요?"
"행복하다! 엄청!"
정말 그래 보여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 진짜 이상해. 저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웃고 있던 치아키가 멍하니 저를 쳐다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턱 붙잡았다. 우와. 손 완전 뜨거워.
"...선배, 손 뜨거워요."
"그럴 것 같다!"
"더워요."
"나도 덥다!"
덥다고 말하며 움직이는 입술들의 좁아져 오는 그 간격 사이로 숨이 오갔다. 숨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단단히 연결된 공간 안에서 서로 뒤섞이길 기대하며 눈을 내려 닫은 미도리는 시간이 지나도 제게로 닿아오지 않는 치아키 덕에 다시 제 바닷빛 눈동자를 세상에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제 눈동자와 마주친 고동색의 눈동자는 주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무언가를 담아낸 채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제 눈을 그대로 삼켜 파란 녹빛을 증발시켜버릴 것 같아 그대로 숨을 멈추고 일렁거림을 마주하고 있기를 잠시, 열기가 훅 제게서 멀어졌다. 조금 제게서 거리를 둔 치아키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멀뚱히 서서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어폰이 연결되어 있는 MP3를 꺼내 이어폰을 뽑아내는 것을 미도리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타카미네"
"...네?"
"이쪽으로!"
모리사와 치아키의 원맨쇼에 온 것을 환영한다! 라고 외치며 치아키는 미도리를 공원 가운데에 있는 작동이 중단된 분수 쪽으로 잡아 이끌었다.
열기에 취한 걸까. 정신 없어. 맥락을 못 따라잡겠는데. 방금 그건 뭔데. 질질 이끌려 분수 앞에 위치하게 된 미도리의 머릿속은 뿌연 수증기가 가득찬 것 마냥 흐릿하고 뒤죽박죽이었다.
그런 미도리의 앞의 분수대 위로 올라선 치아키는 MP3플레이어의 볼륨을 최대로 키우더니 마치 자신의 무대를 하는 것 마냥 퍼포먼스를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이어 세 곡을 마치고 난 치아키가 물끄러미 미도리를 쳐다보기에 미도리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던졌다.
"...히어로가 원래 사람들이 앉는 자리를 그렇게 밟고 올라서도 되는거에요?"
"흐음"
분수대에서 풀쩍 뛰어내린 치아키가 다시 다음 노래를 흘려보내는 제 MP3에게 흘깃 시선을 주고는 미도리의 양팔을 붙잡았다.
"같이 추자."
"에?"
그대로 한 손은 미도리의 허리에, 다른 한 손은 미도리의 손을 단단히 맞잡은 치아키는 미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저 이 노래 잘 몰라요. 상관없다! 그래서 춤도 모르는데. 원래 정해져 있는 춤은 없어. 그냥 되는 대로 밟는거다! 그게 뭡니까..
저를 꼭 붙들고 있는 사람이 옆으로 한걸음 옮기면 저도 따라서 한 걸음, 다시 제자리로 한걸음 옮기면 저도 또 다시 따라서 한 걸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며 되는대로 밟고 있던 미도리는 어느새 치아키가 자신에게 발을 맞춰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오- 타카미네 역시 잘 추는구나"
"그ㄹ..."
미도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래의 마지막 후렴구가 흘러나오자 치아키는 그대로 미도리와 함께 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시 페이스를 넘겨줘 버린 미도리는 치아키에게 맞추려 애를 쓰며 치아키를 더 단단하게 붙들자 치아키는 웃음을 터뜨리며 속도를 높여 돌았다. 제 앞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주변 배경은 잔뜩 뭉개져 빠르게 지나가고 오로지 시야에는 행복하다는 듯이 웃는 얼굴만이 들어찼다. 귓가에는 바람소리, 노랫소리, 연인의 웃음 소리. 여전히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열기. 몇 바퀴를 돌았는지도 모르겠어. 회전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몸이 붕 떠올라 땅 위로부터 멀어지는 듯 아득하니 현실감각이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 그 사이에서 헤엄치는 듯한 미도리의 기분을 아는 건지 손에 힘을 주며 치아키는 노래가 끝나감에 맞춰 회전 속도를 서서히 늦추었다. 노래가 끝나고 둘은 멈췄지만 여전히 세상이 핑그르르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내가 돌고 있는 건가.
"어땠나, 타카미네"
더운 날이지만 나름 괜찮은 기분이지?
"..덥지만요."
"타카미네만 괜찮다면 한 곡 더 출까?"
잔뜩 풀린 눈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의 손을 놓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 연인을 바라보며 치아키는 후끈 달아오른 열기 속에서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미도리에게 몸을 더 가까이하며 자신 역시 붉디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치아키와 함께 또 다른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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