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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 믹서기님(@lsy_tansan)께서 소재 “꽃다발” 주셨습니다 :D
‘데리러 오지 마세요.’
화면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치아키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먼저 일 때문에 늦게 집에 들어갈 것 같다고 아침에 얘기를 해 두긴 했으나, 저녁식사도 하지 않은 채 예상 외로 일찍 돌아오게 되어 집에 도착하자 마자 곧바로 보낸 데리러 가겠다는 메시지에 대한 답이 뭐랄까, 느낌이 좀.
왜, 를 적으려다 움찔거리며 멈춘 손가락이 허공에서 헛돌다 화면을 눌러 본심과는 다소 다른 문장을 찍어냈다.
‘알겠다, 그래도 혹시 필요하면 불러줘. 좋은 시간 보내고 와라.’
“…”
미간을 좁히고 제가 쓴 메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결국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은 빼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부엌에 들어가 불을 켜니 자신이 집에 나가기 전 보았던 풍경 그대로였다. 일은 없고 저녁 약속만 있다더니 많이 피곤했나, 약속시간까지 아무것도 챙겨먹지 않고 줄곧 자다가 바로 저녁식사를 하러 나간 모양이지. 여전히 인덕션 위에 올려져 있는 맑은 국이 담긴 냄비의 뚜껑을 열어본 치아키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냄비를 살짝 흔들어 뿌옇게 변하는 국물을 바라보았다. 항상 끼니를 챙기라고 잔소리 하는 쪽은 저보다는 상대방이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다시 뚜껑을 내린 후 인덕션에 불이 들어오게 한 뒤 냉장고로 향해 오늘 아침 접시째로 랩으로 감싸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달걀말이와 카마보코를 꺼내 랩을 벗겨내고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렸다. 본인이 아침에 챙겨먹었던 메뉴였으므로 랩에 감싸인 채 그릇 위에 있던 차가운 음식들은 제 몫이 아닌 반찬이었다. 국과 반찬을 데우는 동안 마찬가지로 오늘 아침에 지어놨던 밥을 퍼다가 그릇에 담은 뒤 찬장을 열어 후리카케를 꺼내왔다. 식은 지 오래인 조금 질척거리는 쌀밥을 데울까 잠깐 고민하던 치아키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위에 곧장 가루를 쏟아 붓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그대로 얌전히 밥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국이랑 반찬은 따뜻할 테니까. 꽤 뜨거워진 냄비에서 국을 그릇에 덜어내고 저 외에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전자레인지를 열어 반찬그릇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아침엔 그래도 이것보다는 맛있게 먹었던 것 같은데. 그릇을 비워가던 치아키의 시선이 식탁 끄트머리 위에 놓인 유리병에 박혔다. 언제 식탁으로 옮겨왔지. 그 안에는 잘 말린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제가 상대방에게 약 2주전에 선물한 것이고, 제가 가져왔던 생화를 이렇게 깔끔하게 말린 것은 상대방의 솜씨다. 난데없이 장미꽃을 선물했던 이유는, 그리고 그 때 미도리는. 시선을 여전히 마른 꽃잎에 붙박아 둔 채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치아키는 식사를 끝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치아키는 여전히 아무런 답장이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전송완료표시가 떠 있는 제 마지막 메시지를 생각하니 절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굳이 썼던 마지막 문장을 지웠어야 했을까? 샤워를 마친 뒤 거실로 향하던 치아키의 눈에 개수대가 들어왔다. 개수대에 그릇이 꽤 쌓여 있었다. 그 중 9할은 본인이 사용한 식기였으므로 동거인이 돌아오기 전에 설거지도 해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까 식사 직후에 바로 했어야 했는데. 소파에 앉아 해야 할 집안일을 차례대로 떠올리며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치아키의 손이 점차 느려지다 종내는 젖은 수건과 함께 소파위로 떨어졌다.
“…선배!”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타카미네 미도리가 제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부르고 있었다.
“아, 타카미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술 냄새가 났다. 말끝도 미묘하게 늘어졌다. 잠에서 방금 깨어나 어지럽던 시야도 진정이 되자 조금 불그스름해진 얼굴도 보였다. 여전히 축축한 수건을 쥐고 있는 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회복된 시야와는 달리 아직 갈라져 나오는 음성으로 질문에 답했다.
“깜빡 잠든 모양이다.”
술은 얼마나 한 건가.
“으응, 집에 언제 들어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까 메시지 보냈었잖아. 그 모습으로 집에 온 거야? 어떻게?
“이 날씨에 난방도 안 켜두고..”
오늘 누구랑 만나는 약속이었어? 평소엔 나한테 말해줬잖아.
“설거지는 왜 저렇게 쌓여있어요?”
순간 치아키의 눈가가 꿈틀거리더니 얕은 한숨과 함께 원래대로 돌아왔다.
“…미안하구나. 안 그래도 하려고 생각하던 중에 잠을 자버려서. 지금 당장하도록 하마.”
잔뜩 갈라져 평소보다 가라앉았지만 바람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조곤조곤 변명을 늘어놓으며 여전히 제 어깨에 올려져 있던 미도리의 손을 제 손으로 덮고 힘을 주어 꽉 쥐었다 놓았다. 자연스레 흘러가는 듯한 동작으로 미도리의 팔목을 붙잡아 내린 뒤에 일어나 뒷목을 주무르며 부엌으로 향하려는 치아키의 팔을 미도리가 붙잡았다.
“음?”
“당신…”
저를 부름과 동시에 물기가 서리는 눈가에 당황한 치아키가 황급히 몸을 돌려 두 손을 제 손목을 잡아챈 이의 얼굴을 향해 뻗었으나 그 뒤에 흘러나오는 음성에 두 손은 차마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미워.”
조금 남아있던 잠기운이 모조리 달아나버렸다.
“나가주세요.”
뭐?
미도리는 붙들고 있던 손목을 놓고 방 안으로 들어가 치아키의 외투를 꺼내 와 그 주머니 안에 치아키의 휴대폰을 넣은 뒤 간신히 고개와 눈동자만 돌려 제 행적을 쫓는 치아키에게 건넸다.
“나가달라구요.”
거실 형광등 아래 반짝거리는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물방울이 흘러내리자 치아키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외투를 건네 받아 집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데리러 오지 말라는 메시지에 ‘왜?’ 라고 답할 수 없었던 그 순간처럼.
유독 기뻐 보였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괜히 속에서 시꺼멓고 불쾌하게 꿀렁거리며 올라오는 무엇 때문에 차마 얼굴을 똑바로 오래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상대방은 꽤나 세심해서 금방 제가 조금이라도 불쾌해 하는 부분이 있으면 금방 캐치해내곤 했다.
“네…!”
순수하게 행복해하는 그 대답에 다시 한번 속이 비틀리며 꿈틀거렸다. 입에 하고 싶은 말들이 고였다. 상대가 상대이니 당연히 기쁘겠지. 그냥 받은 물건 그 자체에 대해서만 기뻐했어도 이렇게까지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진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이 상황보다는 이런 기분을 느끼는 제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다. 진짜 별 것 아닌데. 머리로는 알고있는데.
“선배, 있잖아요”
등을 보이고 있는 저를 돌려세우려는 듯한 즐거운 목소리에 섬찟함이 등을 타고 올라와 뒷목에 닿았다. 목을 돌리는 순간 끼긱거리는 기괴한 소리가 저 즐거운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아, 응”
축축한 손바닥을 들어올려 두 눈썹과 그 사이를 매만졌다. 미간을 확인한 손 끝이 코를 타고 내려오며 눈가를 쓸고 난 후 등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몸을 돌리는 순간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괴상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호선을 그린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라보자 상대방이 손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며 웃음 섞인 음성으로 무엇인가를 말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들어야 할 사람은 저 밖에 없었지만 자신은 제대로 그 말을 듣지 못 했으니까. 잠시 상대방의 꼼지락거리는 손을 응시하던 눈을 굴려 그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만을 뇌리에 새기고 되뇌며 따라 웃었다. 점점 속에서 꿈틀거리던 것이 가라앉았다. 입 속에서 맴돌던 단어 조각들이 공기로 화했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즐거운 음성 사이로 길게 안도의 숨을 쪼개고 쪼개어 뱉어 냈다. 혹시나 상대에게 닿을까, 아주, 아주 조그맣게 쪼개어내어. 조심스럽게.
그 사이에 즐겁게 말을 이어가던 상대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던 입과는 달리 언제 제 손에 쥐여진 물건을 만지작거렸냐는 듯 희게 질려 푸른 핏줄을 툭 내보이며 완전히 멈춰 있었다.
제 기분에 대해서 민감한 상대방의 즐거워 보이는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던 치아키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 했다.
그 날, 치아키는 미도리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했다.
다행히도 외투 안에 지갑이 그대로 들어있어 근처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 들어와 음료를 한 잔 시키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큰 유리창 밖으로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집을 나왔지만 한동안 문 바로 앞에서 서 있었다.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시 문을 열지도, 다른 어디로 가지도 못 하게 만들었다. 소리가 잦아들고 난 뒤 완전한 고요가 찾아오자 그제서야 치아키는 몸을 움직여 장소를 옮겼다.
아마 몇 시간 뒤에 그 형태가 어떻든 집에 돌아갈 수 있는 허락이나 다름없는 연락이 올 것이다.
창 밖으로 간간히 새벽을 가르며 사라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눈으로 따라가며 돌아가서 할 말을 골랐다.
모리사와 치아키가 오늘 입 밖으로 차마 내지 못한 말들은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한 그 날보다 많았다. 그래서 동이 틀 때 즈음 도착한 ‘미안해요’ 라는 메시지에 당장 패스트푸드점을
뛰쳐나와 개점을 준비 중인 꽃가게에 들러 장미 꽃다발을 산 뒤 다시 집으로 달려갔다.
“타카미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편한 홈웨어 대신 외출복을 입고서 살짝 젖은 앞머리에 발개진 눈가의 타카미네 미도리가 저를 반겼다. 미약한 술냄새와 함께 익숙한 편백나무 향이 장미향에 섞여 코를 찔렀다.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던 미도리가 말문을 트기도 전에 돌연 콜록대기 시작하자 치아키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괜찮나 타카미네!”
연신 기침을 터뜨리던 미도리는 다시 눈에 눈물을 매달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한 손으로 여전히 꽃다발을 그러쥔 채 미도리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들어온 치아키는 꽃다발은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미도리의 손을 놓고 컵을 꺼내 물을 따라 미도리에게 권했다.
물을 마시고 진정된 저를 바라보는 치아키의 눈을 피하던 미도리의 시선은 꽤 오랜 시간동안 식탁 위의 꽃다발 위에 머물렀다. 그런 미도리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다 드디어 시선이 맞물리자 치아키는 새벽 내내 제가 골랐던 말들 중 가장 볼품없는 말을 입에 올렸다.
“날 미워하지 말아줘.”
내가 잘못했어.
더 말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푸른 눈동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도르륵 굴러가 꽃다발을 그 안에 담았다. 꽃다발을 향해 뻗어가던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 꽃잎을 쓰다듬었다. 미도리의 손 끝이 닿은 매끈한 꽃잎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 사이로 굴러가는 조그마한 물방울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집 안이 훈훈하면서도 건조했다. 제가 어젯밤 깜빡한 난방기를 틀어놨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입 안이 더 바싹 메말라왔다.
시선이 어긋난 채로 한동안 둘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왜 말을 안해요, 선배”
다시 푸른 눈이 저에게 향했다. 고요했던 푸른 눈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꽃 말고,”
말을 해달라구요.
그 순간 깨달았다. 세심한 너는 또 다 눈치를 채고 있었구나.
지금 이 순간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레 말려 둔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밟혀 손끝이 저려왔다.
“…너한테, 싫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쁜 소리만 해줘도 모자를 판에, 시꺼멓기만 한 속 얘기를 너에게 내가 하고 싶지 않았어. 굳이 떼쓰는 애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고. 이상하잖아. 좋은 것만 들려주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다 알고있다는 듯한 상냥한 말투로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괜찮아요.”
“많이 이상한데.”
“내가 듣고 싶어요.”
“네가 아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럼 더 말해줘요.”
빠르게 오고 가는 대화에 숨이 가빠왔다. 조금만 더. 더 가면 더 이상은.
“난 선배를 따라서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꽤 오래 걸렸는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나한테 너무 야박하게 군 것 같아서.”
가빠 오던 숨이 멈췄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전부 들려줘요. 하나도 빠짐없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몸 한 구석 어디선가 꽤 오랜 시간 어설프게 쌓아 둔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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