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 스타즈

[치아미도] 기면증

Rache_ 2019. 4. 13. 19:43

처음엔 단순히 춘곤증이라 생각했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앞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깨워지는 일이 부쩍 늘었다.

타카미네씨, 요즘 계절 타?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수면시간 잘 챙겨.

요즘 일찍 잠들었고 적당히 해가 뜬 뒤에 일어났기 때문에 잠이 부족한 게 원인은 아닐 것이다. 정말 단순히 봄이라 그런 걸지도. 겨울과 봄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날씨에 나처럼 꾸벅꾸벅 조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제일 그럴싸한 이유였다. 올해 봄은 유독 전국 전역에 퍼지는 속도가 느렸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전철에서부터였다.

내려야 할 역을 잠을 자느라 놓쳤다. 바로 전 역에서 다음 역이 하차 역임을 확인한 뒤 등받이에서 등을 떼어내고 품 안에 끌어안고 있던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맸다. 더 이상 난방을 해주지 않는 전차 안은 사람이 꽤 많아 날씨에 비해 공기가 푹할 정도였다. 정차하면 일어서야지.

 

감기는지도 몰랐던 두 눈을 도로 떴을 땐 이미 하차역을 지나 다섯 정거장을 더 온 후였다. 여전히 상체는 등받이와 거리를 두고 금방이라도 의자로부터 멀어질 듯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눈을 뜬 후 이상하리만치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빠르게 상황파악을 끝내고 한 번도 내려본 적 없는 원래의 목적지로부터 다섯 정거장이나 떨어진 낯선 역에서 내려 반대편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예상했던 귀가시간보다 1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뭔가 이상했다.

 

 

 

 

 

잠에서 깼다.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협탁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요란한 소리로 우는 휴대폰이 좀처럼 손에 잡히질 않았다. 손이 내려앉은 곳은 딱딱한 나무재질의 협탁 위가 아닌 부드러운 이불 위였다. 묘한 기시감에 이불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낮은 웃음소리가 고막을 잔잔히 울렸다. 바로 옆에 있는 듯 숨이 귀 바로 위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다. 간지러워,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알람소리가 뚝 끊겼다. 시간이 지나 스스로 끊겼다기에는 인위적인 타이밍이었다.

타카미네, 네가 키가 큰 건 사실이지만 어느 소년만화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손이 여기까지 닿을 리 없지 않나.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점점 귀에서 멀어졌다. 이불 위에서 멈춘 손을 목소리의 주인이 제 손과 얽었다. 따뜻했다. 따뜻해서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얽혀있는 손에 힘을 주어 더 꽉 붙들고 싶었다. 손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일어나야지- 목소리의 주인이 붙잡은 손을 장난스레 흔들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멋대로 덜렁거렸다. 그러고는 멀어지는 온기에 여전히 닫혀있던 눈꺼풀 아래로 눈이 뜨거워졌다. 여전히 입은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가요? 계속 잡아주고 있음 안돼요? 안에서 맺힌 말 위로 아득해지는 발소리가 얹혔다.

오늘 아침은 이 내가 맡도록 하지!

눈을 떴다. 천장으로 향한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고 협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코팅된 나무재질의 가구 위로 손이 턱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조금 손을 옆으로 옮겨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눈 앞으로 가져와 화면을 켜니 어두운 배경화면위로 흰 숫자가 떠다녔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나보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의 왼쪽에 한 사람이 더 들어올 만큼의 공간이 남아있던 침대만큼이나 침대보다 살짝 낮은 협탁에. 이제는 누워서 팔을 뻗으면 닿는 그 협탁에.

 

어젯밤 설정해둔 알람이 울릴 때까지 마른 세수를 하느라 얼굴 위로 올린 두 손을 굳이 내리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타카미네씨!

어떡해 많이 피곤한가봐, 괜찮아요?

 

모니터링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보는게 좋을 것 같지 않아요?

그래요,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집중하겠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난 타카미네씨 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 어떻게 조는 것마저 안쓰럽지?

음, 근데 아까와는 다르게 잠 냄새가 나지 않기는 해요.

아 난 자기가 그럴 때마다 소름 돋는 거 알아? 짐승들도 잠 냄새는 못 맡을 거야!

 

사람들 사이에서 잘게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속에 미안함으로 뭉개진 웃음소리도 함께 섞였다.

정확한 진단이었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모두 다시 화면을 보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누구 한 명만 일찍 집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딸기 스무디를 빨대로 쭈욱 빨아 마셨다. 방금 음료픽마저 너무 본인이라며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고 온 참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본인답다고 이야기 해 줄 사람들인만큼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그들은 나에게 오랜시간동안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어색했던 처음과는 달리 가장 나중에 합류한 멤버라며 나보다 작은 몸집의 그들로부터 막내취급을 받아온 지도 꽤 되었다. 나도 그들을 꽤나 편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소개를 받던 날을 돌이켜보았다. 항상 초면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고역이었다. 타고난 성향은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손끝으로 빨대를 건들이며 새빨간 딸기 알갱이가 연한 색의 음료에 뒤섞이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눈 앞의 창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문 밖에 누군가 있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창문의 왼쪽 끝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사람이 슬쩍 고개만 돌려 나를 향해 보았다. 그러다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어보인 그는 몸을 완전히 돌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뭐라고 외치는 듯 했다. 손에 감긴 테이프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적갈색의 머리카락과 끄트머리가 금빛인 녹색 넥타이가 격한 움직임에 따라 휘날렸다. 나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올려 마주 인사했다. 그는 유리창이라는 장애물 덕에 아주 조금 뿌옇게 보였다.

 

양손으로 들고 있던 컵이 발치에 떨어지며 아직 조금 남아있던 스무디가 신발을 더럽혔다. 퍼뜩 정신이 들어 연분홍빛 액체로 더러워진 대리석 바닥과 신발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당연하게도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옆 건물의 회색 벽 뿐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던 창문은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통로에 나 있던 창문이었으니까.

내가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본 사람이 있을까, 뒤를 보았지만 계단 밑의 3층으로 이어지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만 통로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통로에는 나 뿐이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누군가의 신청곡을 틀어주었다. 그리 좋지 않은 음질의 노래를 반주삼아 운전석에서 빈 말로도 잘 부른다고 하지 못할 노래실력을 뽐냈다. 운전대를 잡은 팔을 제외하고 온몸을 흔들어가며 신나게 음이탈까지 아낌없이 시전해준 덕에 정신 빠질 듯이 웃었다. 너무 웃어서 배가 당겼다. 매일매일 불러주면 나 식스팩 복근도 생길 것 같아. 그런 시덥잖은 농담을 던졌더니 받아치는 것 마저 코미디였다.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눈을 떠보니 내가 배를 잡고 웃게 만들었던 노랫소리는 울음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열심히 웃던 내가 웃음 소리를 뚝 그치고 목을 아래로 푹 꺾자 그 소름끼치는 광경에 내 이름을 외치며 급히 차를 길 옆에 세웠던 운전자는 기절한 나를 확인하고는 너무 놀라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름을 불러도, 어깨를 강하게 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안전밸트에 기대 휘청거리는 나를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뒤늦게 코 밑에 가져다 댄 손가락에 느껴지는 숨이 꽤 고르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차를 돌려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했다. 잠에서 깨어나듯 깬 나는 정신 차린 나를 보고도 끊임없이 펑펑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병원에 갈 거라 외치는 운전자의 차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응급실에 도착했고, 의사 선생님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응급실에서 여전히 진정하지 못하고 울고 있는 나의 보호자는 장소에 딱 들어맞는 퍼즐 같았지만 정작 환자의 입장으로 온 나는 혼자 분위기에 흡수되지 못하고 붕 떠버렸다.

 

 

 

 

 

TV를 보다가 또 정신을 놓아버렸다. 이번엔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잤는지 다시 제대로 들어올리려니 너무 아팠다. 이거 없던 디스크도 생기는 거 아냐? 기를 써서 목 운동을 끝낸 뒤 제대로 침대로 가 잠을 자기로 했다. 아직 밤 10시도 되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도리군!

아니 말을 하다가 조는 건 좀 심각한 거 아님까?

아…

병원 꼭 가보십셔. 이건 아닌 것 같슴다.

그렇소. 그냥 두면 안되오.

 

 

 

 

 

역시 스스로도 안되겠다 싶어서 일정이 없는 날, 병원에 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하냐고. 가정의학과?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이제야 바람에 봄기운이 섞여 돌아다녔다. 어디서부터 흩날려 왔는지 알 수 없는 벚꽃잎들이 모여 다니며 바람에 따라 온갖 형상을 만들어냈다. 도로 중앙에서 춤추던 꽃잎들은 횡단보도 위로도 날아들었다. 흰색의 페인트와 검은 도로 위를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꽃잎은 눈에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했다. 살랑살랑 불던 잔바람은 도로 위에 잠시 머물고 금새 사라져버린다 싶다가도 다른 줄기의 바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땅에 앉을 새 없이 움직이는 꽃잎들은 정신이 없어보였다.

신호가 바뀌어 꽃잎들을 바라보던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 즈음 갔을까, 돌연 잔바람과는 다른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함께 길을 건너던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나부끼고 가볍고 즐거운 비명소리가 귓가에서 낮게 휘몰아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뒤섞였다.

푸른 하늘 위로 달려들 듯 날아가는 흰 꽃잎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사이로 건너편 신호등 옆의 검정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까맣고 하얗고 푸른 배경에서 붉은색 운동화가 눈에 박혔다.

 

 

 

 

 

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땐 정말 병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원 침대 위였다. 이쯤 되니 아 또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길바닥에서 쓰러져 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리고 문제가 더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뭐야 이거, 링거? 들어올린 팔에 꽂힌 관에 한 번 놀라고 머리에 감겨 있는 붕대에 두 번 놀랐다. 머리부터 부딪혔나봐.

좀 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병실 안은 아직 햇빛만으로도 밝았다. 머리만 울리는 걸 보니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어서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고 괜찮은 건지 척도를 모르겠다. 움직일 수 있으니 괜찮은 것이겠거니. 몸을 세우니 병원 침대가 한 눈에 보였다.

내 오른쪽 다리 위에 손을 올리고 침대 위로 엎드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는 사람이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흰 침대 시트 위로 흩어져 있는 짧은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불그스름했다.

 

 

 

 

 

 

나는 내가 본 그 모습들이 정말 환각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나에겐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광경도 환각이어야 했다.

 

내 의식은 내 무의식을 따라했다.

나는 도로 누운 다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이건 내 의식적인 현실도피 행위였다.